와키사카 야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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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키사카 야스타다는 일본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자 막부의 관리였다. 1767년 와키사카 야스치카의 차남으로 태어나 형의 죽음으로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사찰 봉행과 노중을 역임했다. 그는 야나카 엔메이인 사건과 산교 마쿠란 사건을 재판했으며, 센고쿠 소동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쇼군의 신임을 얻어 로주로 발탁되었다. 1841년 로주 재직 중 사망했으며, 독살설이 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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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키자카씨 - 와키사카 야스오리
와키사카 야스오리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이자 로주로, 미일 수호 통상 조약 체결에 관여했으며, 사쿠라다몬 밖의 변 이후 로주에서 사임하고 은거했다. - 와키자카씨 - 오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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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키사카 야스타다 | |
---|---|
기본 정보 | |
씨명 | 와키사카씨 |
이름 | 와키사카 야스타다 |
본명 | 와키사카 야스타다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후기 |
출생 | 메이와 4년 6월 5일 (1767년6월 30일) |
사망 | 덴포 12년 윤1월 23일 (1841년3월 15일) |
어릴적 이름 | 가메키치 |
자 | 야스타다 |
호 | 창룡헌 |
시호 | 해당 없음 |
계명 | 해당 없음 |
묘소 | 도쿄도나카노구가미타카다의 세이겐지 |
관위 | 종5위하아와지노카미, 종4위하나카쓰카사다이후, 시종 |
막부 | 에도 막부 소자반 겸 지샤부교, 니시마루 노중격, 노중 |
주군 | 도쿠가와 이에하루, 이에나리 |
번 | 하리마다쓰노 번 번주 |
씨족 | 와키사카 씨 |
부모 | 아버지: 와키사카 야스치카 어머니: 우에다 요시마사 딸 |
형제자매 | 야스노리, 야스타다, 야스즈미, 야스토모, 롯카쿠 히로토미, 구시, 이타쿠라 가쓰나가 정실, 아코토, 나오 |
배우자 | 마쓰다이라 사다야스 딸 위, 쓰모리 아쓰요시 딸 |
자녀 | 야스타케, 야스아키라, 마사코, 히사코, 가즈코 |
번주 정보 | |
이전 번주 | 와키사카 야스치카 |
다음 번주 | 와키사카 야스오리 |
직책 | 다쓰노 번 번주 (와키사카 씨) |
대수 | 8 |
임기 | 1784년 ~ 1841년 |
2. 생애
메이와 4년(1767년) 와키사카 야스치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야스노리가 일찍 사망하여 적자가 되었다. 덴메이 4년(1784년)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했다.
사찰 봉행을 모두 2번, 노중을 역임했다. 와키사카 씨는 원래 도자마 다이묘였고, 간포다이였지만, 도자마 가문은 막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없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야스마사는 언변이 뛰어나고 용모가 수려하여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눈에 띄어 간세이 3년(1791년) 이례적으로 사찰 봉행에 등용되었다.[1]
이 기간 동안 야나카엔메이인 사건, 산교 마쿠란 사건을 재판했다. 이후 다쓰노 번의 정사에 전념했다.
분카 8년(1811년) 조선 통신사의 막부 부사[3]로 선발되어 배 30여 척을 빌려 쓰시마에서 대응을 수행했으며, 『역지빙사록』에 관련 기록을 남겼다.
쇼군 이에나리의 요청으로 다시 사찰 봉행에 기용되었으며, 센고쿠 소동을 처리하였다.
덴포 7년(1836년) 2월, 니시노마루로주카쿠(老中格)가 되어 쇼군 세자 이에사다의 측근으로 발탁되었다. 같은 해 9월, 와키사카 가문은 간푸다이(願譜代)에서 정식 후다이가 되었고, 이듬해 덴포 8년(1837년) 7월, 혼마루 로주로 승격되었다.
덴포 12년(1841년), 로주 재직 중에 사망했다. 향년 74세.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독살설도 나돌았다. 가독은 장남 야스타쿠가 이었다.
2. 1. 유년기와 가독 상속
메이와 4년(1767년) 와키사카 야스치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야스노리가 일찍 사망하여 적자가 되었다. 덴메이 4년(1784년)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했다.2. 2. 사찰 봉행 시대
덴메이 4년(1784년) 아버지 와키사카 야스치카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한 와키사카 야스마사는 사찰 봉행을 두 차례 역임했다. 와키사카 씨는 도자마 다이묘였고 간포다이였지만, 도자마 가문은 막부의 요직을 맡을 수 없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야스마사는 언변이 뛰어나고 용모가 수려하여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눈에 들어 간세이 3년(1791년) 이례적으로 사찰 봉행에 등용되었다.[1]야스마사는 사찰 봉행 재직 중 야나카엔메이인 사건과 산교 마쿠란 두 사건을 재판했다. 교와 3년(1803년) 오오쿠(大奥) 여중들이 연루된 야나카 엔메이인 사건이 발생했고, 분카 3년(1806년)에는 서본원사 교의를 둘러싼 쟁론인 산교 마쿠란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2. 2. 1. 야나카 엔메이인 사건
교와 3년(1803년) 와키사카 야스사다는 여자 밀정을 이용해 야나카 연명원 사건을 조사하였다. 당시 연명원 주지 닛준은 가부키 배우 초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전해지지만, 다른 설도 있었다. 닛준이 다수의 오오쿠 여중들과 밀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야스사다는 5월 26일 직접 연명원에 들이닥쳐 닛준 등 파계승들을 검거했다. 닛준은 7월 29일에 사형에 처해졌다. 야스타다는 이 일로 단숨에 이름을 떨쳤다.[1][2]2. 2. 2. 산교 마쿠란
삼업혹란은 서본원사의 교의를 둘러싼 쟁론이다. 막부 당국은 각 교단의 종지나 교의를 둘러싼 쟁론에는 개입을 삼가는 것이 통례였지만, 이 사건에서는 일부 신자들이 본산에 집단으로 몰려가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사찰 봉행에 제기되었다. 야스타다는 진종대곡파 향월원 심려의 영향을 받아 불교 교의에 통달했기 때문에, 상당히 심도 있는 조사를 했다. 쌍방으로부터 청문을 실시, 분카 3년(1806년) 7월 11일에 판결을 내려, 서본원사에 대해 종문 불취체(宗門不取締)의 죄가 있다고 했지만, 종교의 교의를 둘러싼 쟁론인 점도 고려하여 100일간 폐문이라는 가벼운 처분으로 끝냈다. 야스타다의 이 판결은 명재판이라고, 노중 수좌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로부터도 칭찬을 받았다.2. 2. 3. 실각
야스타다는 진종대곡파의 향월원 심려의 영향을 받아 불교 교의에 통달했기 때문에, 삼업혹란에 대해 상당히 심도 있는 조사를 했다. 쌍방으로부터 청문을 실시, 분카 3년(1806년) 7월 11일에 판결을 내려, 서본원사에 대해 종문 불취체(宗門不取締)의 죄가 있다고 했지만, 종교의 교의를 둘러싼 쟁론인 점도 고려하여 100일간 폐문이라는 가벼운 처분으로 끝냈다. 야스타다의 이 판결은 명재판이라고 노중 수좌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로부터도 칭찬을 받았다.[1]이러한 솜씨를 보인 야스타다도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격으로, 자신의 첩의 일로 참언을 당해 실각, 사찰 봉행을 사임했다.[1]
2. 3. 다쓰노 번 통치와 조선 통신사
분카 8년(1811년), 야스다는 조선 통신사의 막부 부사[3]로 선발되어 배 30여 척을 빌려 쓰시마에서의 대응을 수행하였다. 『역지빙사록(易地聘使録)』에 관련 기록을 남겼다.[3]2. 4. 사찰 봉행 재임
야스마사는 쇼군 이에나리의 눈에 띄어 이례적으로 간세이 3년(1791년)에 사찰 봉행에 임명되었다.[3] 이 기간 동안 야나카 엔메이인 사건, 산교 마쿠란 사건을 재판했다. 이후 자신의 영지인 다쓰노 번의 정사에 전념했다.분카 8년(1811년)에는 조선 통신사의 막부 부사[3]로 선발되어 배 30여 척을 빌려 쓰시마에서 대응을 수행했으며, 『역지빙사록』에 관련 기록을 남겼다.
16년 후, 쇼군 이에나리의 직접적인 요청으로 다시 사찰 봉행에 기용되었다. 이는 막부 안팎의 사정에 밝은 사람들조차 놀랄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엔메이인 사건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오오쿠(대오) 여중들의 추문에 이에나리가 질려 야스다를 재기용하여 칼을 대려 했다고 한다. 실제로 추문이 끊이지 않던 사찰 관계자들은 야스다의 재등장에 전전긍긍했고, 에도 시내에서는 "또 나왔다, 스님 깜짝 족제비 털가죽" (와키사카 야스지 항목 참조)이라는 풍자시가 나돌았다. 그러나 야스다는 사찰의 풍기 문란에는 손을 대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2. 4. 1. 센고쿠 소동
분세이 연간부터 다지마 이즈시의 센고쿠 가문에서는 당주의 가독 상속 문제와 번정 운영을 놓고 센고쿠 사쿄와 센고쿠 소슈 두 가로가 각각 파벌을 형성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덴포 6년(1835년) 소슈파의 번사 가미야 우타타는 탈번하여 허무승으로 신분을 바꾸고 에도에 잠복하여, 사쿄의 비행을 막부에 소원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사쿄는 발 빠르게 손을 써서 노중(로주) 수좌 마쓰다이라 야스토에게 호소했고, 마쓰다이라 야스토는 남쪽 마치 부교인 쓰쓰이 마사노리에게 가미야를 체포하게 했다.그러나 허무승의 관할은 사찰 부교에 있었다. 가미야가 허무승으로 신분을 바꾼 것이 신앙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에서인지 외견상으로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사건은 사찰 부교, 마치 부교, 간조 부교로 구성된 평정소로 관할이 이관되었다. 쇼군 이에나리로부터 직접 이 건은 야스다가 전관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조사를 시작했다. 본 건은 지샤 부교 긴미부쓰 시라베야쿠인 가와지 야키치 (후의 가와지 세이모)의 면밀한 조사도 있어, 이즈시 번은 3만 석의 감봉, 사쿄는 옥문, 노중인 마쓰다이라 야스토는 실각되었다 (센고쿠 소동).
2. 5. 로주 취임과 죽음
메이와 4년(1767년)에 7대 번주 와키사카 야스치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야스노리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적자가 되었다. 덴메이 4년(1784년)에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했다.사찰 봉행을 모두 2번, 나아가 노중을 역임했다. 와키사카 씨는 원래 도자마 다이묘였고, 간포다이로 해주었지만, 도자마 가문은 막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없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야스마사는 변설이 시원하고 겉모습도 좋고 남자다운 모습도 좋았다고 하며, 이것이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눈에 띄어 이례적으로 간세이 3년(1791년)에 사찰 봉행으로 등용되었다.
이 기간 동안 야스마사는 야나카엔메이인 사건, 산교 마쿠란 양쪽 사건을 재판했다. 이 사건으로 야스마사는 더욱 중용되었다. 이듬해 덴포 7년(1836년) 2월, 니시노마루로주카쿠(老中格)가 되어 쇼군 세자 이에사다(家祥)의 측근으로 발탁되었다. 같은 해 9월, 와키사카 가문은 간푸다이(願譜代)에서 정식 후다이(譜代)가 되었고, 이듬해 덴포 8년(1837년) 7월, 혼마루 로주로 승격되었다.
덴포 12년(1841년), 로주 재직 중에 사망했다. 향년 74세.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독살설도 나돌았다. 가독은 장남 야스타쿠(安宅)가 이었다.
3. 연보
- 메이와 4년(1767년) - 6월 5일 출생
- 덴메이 4년(1784년) - 4월 13일 가독 상속, 번주
- 덴메이 5년(1785년) - 12월 18일 종5위하, 아와지노카미 칭함
- 간세이 2년(1790년) - 3월 24일 주자번
- 간세이 3년(1791년) - 8월 28일 겸 사찰 봉행
- 분카 원년(1804년) - 10월 6일 종4위하, 나카츠카사노다이후로 칭호 변경
- 분카 10년(1813년) - 윤 10월 12일 주자번 면직, 11월 12일 사찰 봉행 사임
- 분세이 12년(1829년) - 10월 24일 사찰 봉행·주자번 복귀
- 덴포 7년(1836년) - 2월 16일 니시마루 로주격, 지주로 칭호 변경
- 덴포 8년(1837년) - 7월 9일 로주
- 덴포 12년(1841년) - 윤 1월 23일 사망
4. 가계
메이와 4년(1767년) 와키사카 야스치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야스노리가 일찍 사망하여 적자가 되었다. 덴메이 4년(1784년)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했다.[1]
항목 | 내용 |
---|---|
아버지 | 와키사카 야스치카 (1739-1810)[1] |
어머니 | 우에다 요시마사의 딸[1] |
정실 | 에이 - 마쓰다이라 사다야스의 딸[1] |
측실 | 쓰모리 아쓰요시의 딸[1] |
장남 | 와키사카 야스타쿠 (1809-1874) [1] |
차남 | 와키사카 야스히라 (1813-1839)[1] |
딸 | 스코 - 묘린인, 시마즈 시게히데의 양녀, 나이토 마사히로의 정실[1] |
딸 | 마사코 - 아키즈키 타네토모의 계실[1] |
딸 | 타코 - 아키즈키 타네토모의 양녀, 아키즈키 타네히로의 정실[1] |
참조
[1]
웹사이트
延命院事件 えんめいいんじけん
https://kotobank.jp/[...]
2021-10-27
[2]
웹사이트
寺社奉行(じしゃぶぎょう)/ 時代劇用語指南(2008年5月29日)
https://imidas.jp/ji[...]
山本博文
2021-10-27
[3]
문서
대마도에서 응대. 정사는 오구라번주 오가사와라 타다카타. 다른 사람은 하야시 쥬츠사이, 코가 세이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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